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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조아

도이장가

by 니리치 2024.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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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장가는 1120년(예종 15)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여 예종이 향가(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도아장가는 평산신 씨 장절공 유사 平山申氏壯節公遺事 신숭겸(申崇謙)의 행적을 기록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主乙完乎白乎 心聞際天乙及昆 魂是去賜矣中 三烏賜敎職麻又欲 望彌阿里刺 及彼可二功臣良 久乃直隱 跡烏隱現乎賜丁

 

의역(意譯):

님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한, 그 정성은 하늘 끝까지 미치심이여

그대의 넋은 이미 가셨지만, 일찍이 지니셨던 벼슬은 여전히 하고 싶으심이여

오오! 돌아보건대

두 공신의 곧고 곧은 업적은 오래오래 빛나리로소이다.

 

해설 :

두 공신의 충성으로써 국조의 목숨을 건지게 되었음을 노래하고 신하의 도리를 다했으며,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한 귀감이 됨을 추모함

 

형식 :

향찰 표기, 8구체 향가계 가요로 10구체 향가의 잔영이나, 고려 속요로도 볼 수 있다.

 

주제 :

개국 공신 김락과 신숭겸 두 장군의 공덕을 예종이 찬양한 노래

 

연대 :

고려 예종 15년 (1120년) 의의 : 향찰로 표기된 마지막 작품이다.

 

배경:

예종이 서경(西京:平壤)에 행차 팔관회(八關會)가 열렸을 때,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의 가상희(假像戱:가면극)를 보고, 두 장군에 대한 추모의 정을 이기지 못하여 지은 노래이다.

 

예종이 팔관회를 참관하던 중,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입은 채 말을 타고 뜰을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주위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 신숭겸과 김락(金樂)은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워 어려운 처지에 처했을 때 대신 목숨을 바친 공신으로 왕건은 그 공을 높이고자 팔관회를 열어 추모.

 

팔관회 자리에서 왕건은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짚으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옷을 입혀 자리에 앉게 했는데 그러자 두 허수아비가 술을 받아 마시며 춤을 추었다"는 얘기를 듣고 지음.

누군가 두 공신의 가면을 쓰고 허수아비춤을 추는 놀이를 했음을 알려주며 그런 풍속은 신라 이래로 오랜 유래를 가진 것이었다.

 

이두식(吏讀式) 표기로 된 향가(鄕歌) 형식으로, 8구체(句體)를 4구씩 2 분하여 지었다.

[정과정곡(鄭瓜亭曲)]과 함께 향가 형식의 노래가 고려 중기까지 남아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신숭겸:

평산신씨의 시조이다.

본관: 평산(平山). 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 출신(고려사)

-본래 전라도 곡성 출신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됨

-태봉 말기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 등과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

-918년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대장군)을 세웠다.

-927년(태조 10)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공산(公山: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 동수 (桐藪) 전투 때 견훤 군대가 태조를 포위 매우 위급해진 형세에서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싸우다가 왕건을 대신해서 전사 그 덕분에 태조는 간신히 피신했다.

-태조는 그의 동생 능길(能吉), 아들 보(甫)를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 -994년(성종 13) 태사(太師) 개국장절공(開國壯節公)으로 추증, 태묘 사당에 배향되었다.

 

-1120년(예종 15) 신숭 겸과 김락을 추도하여 예종이 향가(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1리에 있는 신 장절공 묘역(申 壯節公 墓域)은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개국공신이 된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역으로 강원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927년 (태조 10) 대구에서 견훤 군과 싸우다가 포위되어 고려 태조인 왕건이 위험하게 되자 신 장군은 태조와 옷을 바꾸어 입은 후 태조를 수풀 속에 숨게 하고, 자신은 임금 수례를 타고 나가 싸우다가 전사함으로써 태조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고려태사신숭겸장군
고려태사개국장절공신숭겸장군묘역

 

태조는 신숭겸 장군이 전사한 곳에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고, 장군의 아우 능길과 아들 보甫를 원윤으로 삼았다. 또한 태조는 팔관회 때 신장군과 김락 등 전사한 공신들을 생각해 그들의 가상을 만들어 자리에 앉히고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 이것이 계속 전승되어 예종이 팔관회에서 이를 보고 충정을 기리는 도이장가라는 노래를 지었다.

 

묘역에는 사당, 신도비, 기념관등이 있다.

사당의 영정은 김기창 화백이 그린 것이며, 신도비는 1805년(순조 5)에 세운 것으로 김조순이 짖고 신위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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